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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의 포도를 덮친 해충
1800년대 중반, 포도나무 뿌리에 달라붙은 흙 속에 필록세라가 미국에서 유럽으로 날아온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프랑스로 돌아간 친척들에게 보낸 장식용 포도나무였습니다. 마치 전염병처럼 점점 퍼져나가기 시작해 19세기 후반에는 이 해충이 전 세계로 번식해 나갑니다. 내성이 있는 포도나무도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와인 만드는 데 사용하는 포도 품종 나무 대부분이 필록세라에 취약하다는 특징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다간 와인 자체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이기 시작합니다. 순수한 선물로 촉발된 이 사건은 거의 와인의 멸종을 가져올 뻔한 희대의 역사적 사건이자 와인의 세계를 영원히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억울하게도, 이 해충은 와인을 말하는 데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필록세라 탐구
1. 필록세라(Phylloxera)란 무엇인가?
원래 필록세라 바스타트릭스(phylloxera vastatrix, 마른 잎을 파괴하는 자)라 이름 지어졌던 조그맣고 노란 진딧물은 포도나무 뿌리를 먹고 살며, 궁극적으로 포도나무의 생명력을 빨아먹는 존재입니다. 몸길이 1~2mm 정도의 작은 곤충으로 포도나무 뿌리와 잎 부분에 기생합니다. 한번 나무에 번식하기 시작하면 한 번에 수백 개의 알을 낳는 엄청난 번식력 때문에 포도나무는 결국 생명을 다하고 시들어 버립니다. 포도나무에는 유럽계 비티스 비니페라(Vitis vinifera)나 미국계 비티스 라브루스카(Vitis Labrusca) 등의 품종이 있지만, 유럽계 비티스 비니페라는 필록세라에 대한 내성이 전혀 없었고, 이 해충이 기생하기 시작하면 수년에 걸쳐 포도원 전체가 시들어 버립니다.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피노 누아 등 와인에 사용되는 포도 품종의 대부분은 유럽계의 비티스 비니페라이므로, 와인 생산자에게 있어서 필록세라는 이름조차 듣고 싶지 않은, 기피해야 할 존재입니다.
2. 필록세라의 역사
필록세라가 유럽에 침입해 온 것은 1863년의 일입니다. 맨 처음 프랑스의 코트 뒤 론(Cote du Rhone)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미국 동해안에서 넘어온 포도나무에 붙어있던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았던 이 해충은 현지 프랑스의 포도나무에 번식하여 유럽 국가에 심지어 전 세계에 위협이 되기 시작합니다. 보잘것없이 보이는 ‘필록세라’라는 조그만 기생충이 포도나무뿐만 아니라 와인의 생산과 이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산업 전반을 광범위하게 무너뜨리는 대재앙을 일으킨 것입니다. 당시 프랑스인 7명 중 1명은 와인 업계나 관련 산업에서 일하고 있었고, 평균적인 프랑스 남성이나 여성들에게 와인은 중요한 열량 공급원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프랑스에 관해서는 와인 생산량의 2/3를 잃게 되어 많은 와인 산지가 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 이같이 작은 벌레가 한 산업에 이처럼 치명타를 줄 수 있다는 것이 좀처럼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3. 필록세라가 일으킨 폐해
이 해충은 1863년부터 프랑스의 지중해 지역에서 시작해 이후 40년 동안 여러 나라의 포도밭을 무참히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길이 1mm에 불과한 이 벌레는 땅속에서 활동하면서 그 피해가 충분히 진행되기 전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포도나무의 뿌리를 먹어 치웠습니다. 이후 필록세라는 전 세계로 퍼져 남아프리카,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캘리포니아에 있는 포도밭을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을 비롯하여 미국과 호주의 와인 양조인들은 포도나무가 노랗게 변하고, 쪼그라들고, 천천히 시들어 죽는 것을 손 놓고 보고만 있어야만 했으며, 살아남은 포도로는 연약하고 질이 안 좋은 와인밖에 만들 수 없었습니다. 필록세라는 1860년대에는 유럽을 강타하고 이후에 아르헨티나, 칠레와 카나리아 제도(Canary Islands)를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와인 생산국에도 도달하여 파괴를 일으켰습니다.
4. 성가신 특징
포도가 부작용이 되는 원인으로는 날씨 이외에도 있어 병이나 해충이 영향을 줍니다. 날씨를 바꿀 수는 없지만, 질병이나 해충이 원인이 되는 것에 관해서는 가능한 한 대책이 취할 수 있습니다. 곰팡이 계의 질병에 관해서는 과실 주위의 통풍을 좋게 하거나 농약을 사용해서 대응하고, 곤충이나 진드기에 대해서는 살충제 등으로 대응해 오고 있었습니다. 와이너리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매년 질 좋은 포도를 많이 수확하기 위한 대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필록세라는 그런 방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이 해충은 매우 성가신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필록세라는 포도나무 뿌리에 기생하며 흙에 서식하기 때문에 살충제를 뿌리는 것으로는 포도나무를 치료가 안 되었던 것입니다. 한번 해충이 침투하면 포도나무를 시들어 버리는데도 구제가 불가능합니다.
5. 처방의 발견
어떻게든 포도나무를 살리기 위해 화학물질을 뿌리기도 하고, 포도원을 아예 물에 잠기게 하거나 독소로 가스를 유입하는 등 온갖 처방이 시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치명적인 벌레의 파괴적 횡포를 멈추게 할 방법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1873년까지 프랑스 정부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에게 상금으로 수만 프랑까지 제시했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와인의 세상이 완전히 끝장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세계의 거의 모든 포도밭이 황폐해진 이후에야 간신히 처방이 발견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유럽의 포도와는 유전적으로 다른 비티스 라브루스카(vitis labrusca) 등의 미국 토종 포도가 필록세라에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프랑스인들은 마지못해 미국 토종 포도나무를 심고, 여기에 유럽산 포도나무를 정교하게 접목하여 미국 토종의 뿌리에 유럽산 줄기와 열매가 자라는 포도나무를 만들었습니다. 필록세라에 의한 폐해를 막기 위해 1900년까지 프랑스 포도나무의 약 60%가 미국 포도나무 뿌리를 가진 종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방법은 현재까지도 사용되며 전 세계 대부분의 포도밭은 비티스 비니페라(vitis vinifera) 포도나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기술이 발전한 오늘날까지도 이 기생충을 박멸할 약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필록세라가 남긴 흔적들
이 기생충의 출몰로 여러 나라의 포도원이 초토화되었지만, 세계의 와인산업이 긍정적으로 변하게 하는 예상치 못한 효과도 발생하였습니다. 나쁜 포도밭은 기존의 나무가 뽑히거나 도태되고 더 개량된 품종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잘 알려진 주요 와인의 블렌딩 방법도 표준화되었는데, 샹파뉴(Champagne)와 보르도(Bordeaux) 와인의 혼합비율을 의미하는 퀴베(cuvée)가 오늘날과 같이 최종적으로 확립된 것이 좋은 예시입니다. 또한 경쟁력이 떨어지는 포도밭은 도태되고 전 세계적으로 기술의 발전과 혁신이 일어나면서 와인산업의 경쟁력이 전반적으로 향상된 것도 역설적으로 필록세라의 덕분입니다. “번영은 위대한 스승이지만, 역경은 더 위대한 스승이다.”라는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필가이자 비평가인 해즐릿william Hazlitt(1778~1830)의 명언처럼 이 해충은 와인 역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위기였지만 오히려 와인산업에 전화위복이 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필록세라라는 작은 곤충이 전 세계 와인 산업을 거의 망하게 할 뻔했던 사건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미국산 포도나무 뿌리가 프랑스 와인 맛을 손상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비티스 비니페라(vitis vinifera) 포도 품종이나 비티스 라브루스카(vitis labrusca) 품종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와인을 마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글을 통해 와인의 품종과 역사에 대한 지식이 확장되고 이해가 넓어지셨으면 좋겠습니다.
